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18년 박정희 시대 막 내려
산업화의 성과와 유신체제의 그림자…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역사적 평가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에서 울린 총성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약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렸다.
사건 발생 47주년을 맞아 당시 발행된 1979년 10월 27일 자 조선일보 호외를 통해 긴박했던 역사적 순간을 되짚어본다.
■ '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호외에 담긴 충격
당시 조선일보 호외는 지면 상단에 '朴正熙 대통령 被擊逝去(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라는 제목을 크게 실었다.
이어 '金載圭 中央情報部長이 銃擊(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총격)'이라는 부제를 통해 사건의 가해자가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임을 알렸다.
호외에는 '車智澈 경호실장 등 5명도 사망'이라는 제목도 함께 실렸다.
신문은 박 대통령이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경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장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가 총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특히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정부 발표를 통해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들에게 질서 유지를 당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국가 최고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당시 정부의 대응을 보여준다.
다만 이 호외는 사건 직후 발표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초기 보도라는 점에서 이후 수사와 재판을 통해 밝혀진 사건의 전모와 구분해 읽어야 한다.
■ 대통령의 최측근이 쏜 총탄…10·26 사건의 배경
10·26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갈등을 넘어 유신체제 말기에 누적된 정치적 긴장 속에서 발생했다.
1972년 유신헌법 시행 이후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장기집권 체제가 강화됐다. 야당과 언론,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도 이어졌다.
1979년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과 부산·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등으로 정국의 긴장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건 이후 김재규는 체포돼 재판을 받았으며, 1980년 사형이 집행됐다.
김재규의 범행 동기와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유신체제 종식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과 권력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정치적 살인이라는 평가가 맞서고 있다.
■ 산업화와 경제성장…박정희 시대의 성과
박정희 정부 시기는 대한민국 경제구조가 농업 중심에서 제조업·수출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된 시기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육성, 중화학공업 투자 등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다.
수출 확대와 산업 기반 확충은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제조업 국가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특히 철강·조선·기계·자동차·전자 등 주요 산업의 성장 기반이 이 시기에 마련됐다는 점은 중요한 역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정부 정책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산업현장에서 일한 노동자와 기업인, 농촌과 도시에서 경제발전에 참여한 국민들의 노력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저임금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노동권 제한 등 사회적 비용도 존재했다.
■ 유신체제와 민주주의의 후퇴
박정희 시대를 평가할 때 경제성장과 함께 반드시 살펴봐야 할 부분은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이후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긴급조치와 정보기관을 통한 정치적 통제, 언론과 표현의 자유 제한, 민주화운동 탄압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정치적 반대세력과 시민사회의 저항이 확대됐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성장의 성과와 권위주의 통치의 문제를 함께 살펴봐야 하는 복합적인 역사적 시기다.
경제발전의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민주주의 침해를 비판하는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평가가 아니다.
■ 10·26 이후 찾아온 '서울의 봄'과 신군부 등장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은 곧바로 민주주의의 안정적인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아래 정치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요구가 확산됐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 내부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에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이 이어졌다.
결국 10·26 사건은 장기집권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지만, 민주주의의 실현까지는 또 다른 희생과 시간이 필요했다.
■ 47년 전 신문 한 장이 던지는 질문
이번에 확인된 조선일보 호외는 단순한 오래된 신문이 아니다.
당시 국민들이 국가 최고권력자의 사망 소식을 어떤 방식으로 접했는지, 언론이 긴급한 정치적 사건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뉴스를 확인할 수 없었던 시대에 신문 호외는 국가적 중대 사건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였다.
신문 지면에 인쇄된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과 굵은 제목, 긴박하게 작성된 기사에는 당시 대한민국이 경험했던 충격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47주년을 맞아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은 한 정치인의 공과만이 아니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국가권력과 시민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의 중요성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역사는 어느 한쪽의 기억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과는 성과대로, 잘못은 잘못대로 기록하고 평가할 때 비로소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된다.
47년 전 궁정동에서 울린 총성은 멈췄지만, 그 시대가 남긴 역사적 질문은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