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호외, 차지철 경호실장 등 5명 사망·김재규 체포·국장 결정 등 긴박한 상황 보도
전국 비상계엄 선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통행금지 연장과 대학 휴교까지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1979년 10월 26일 밤, 대한민국을 18년 동안 통치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대통령을 경호하던 차지철 경호실장 등도 숨졌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측근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2026년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7주기다.
영종뉴스가 확보한 당시 『조선일보』 호외에는 박 대통령의 사망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체포, 정부의 국장 결정, 전국 비상계엄 선포, 최규하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등 사건 직후의 긴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한자로 크게 인쇄된 '朴正熙대통령 被擊逝去(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라는 제목은 당시 사건의 충격을 보여준다.
이번 특별기획에서는 47년 전 신문 지면에 기록된 사건 경위와 정부 발표, 국민 생활에 영향을 미친 비상조치 등을 되짚어본다.
■ “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호외에 실린 충격적인 소식
호외 지면의 가장 큰 제목은 '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다.
그 아래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총격'이라는 내용과 함께 '차지철 경호실장 등 5명도 사망'이라는 부제가 실려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오후 7시 50분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을 받았다.
신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발표와 함께 사건이 발생한 장소, 관련 인물, 정부의 대응 등을 상세하게 전했다.
기사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사이에서 우발적인 총돌 사태가 발생했다는 취지의 당시 발표 내용도 담겨 있다.
다만 이는 사건 직후 발표된 초기 설명으로, 이후 수사와 재판을 통해 김재규가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을 살해한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가 밝혀졌다는 점을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
당시 호외는 국민에게 사건의 발생 사실을 긴급하게 알리는 동시에 정부가 파악한 초기 상황을 전달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 정부, 박 대통령 장례 국장으로 결정
지면에는 박 대통령의 장례와 관련한 정부 방침도 실렸다.
신문은 김종필 국무총리 등이 아닌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발표를 전하면서 박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지면에는 국장 기간을 정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 장례를 치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거행됐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박 대통령의 사망은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 원수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정부 조직과 군 지휘체계, 외교 및 치안 등 국가 운영 전반이 비상상황에 놓였다.
■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호외 뒷면의 가장 큰 제목은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다.
지면 오른쪽에는 '대통령 권한대행 최 총리'라는 제목이 세로로 배치돼 있으며,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의 사진도 실려 있다.
정부는 박 대통령의 사망 이후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최규하 국무총리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으며,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됐다.
이는 국가 최고권력자의 사망 직후 정부가 군과 행정조직을 통해 비상통치 체제를 가동했음을 보여준다.
신문에 실린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제목은 당시 정부의 긴급 대응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보도였다.
■ 통행금지 연장·대학 휴교…국민 일상까지 바뀌었다
뒷면에는 비상계엄에 따른 구체적인 조치도 실렸다.
특히 '통금 연장 밤 10시부터', '모든 대학은 휴교 조처'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당시 야간 통행금지 시작 시간이 앞당겨졌으며, 전국 대학에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언론 보도는 사전 검열을 받게 됐고, 허가받지 않은 집회도 제한됐다.
대통령 사망이라는 국가적 사건이 국민들의 이동과 교육, 언론 활동 등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조치는 국가 비상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통제 조치였지만,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이 광범위하게 제한되는 계엄체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신문 지면은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호외에 남은 초기 보도와 이후 밝혀진 역사적 사실
1979년 10월 26일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다양한 정보와 발표가 이어졌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사망한 상황에서 사건의 정확한 경위와 관련자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 호외에 실린 보도는 사건 직후 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됐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후 수사와 재판, 관련자들의 진술, 역사연구 등을 통해 사건의 전모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신문을 오늘날 다시 살펴보는 의미는 단순히 오래된 기사를 읽는 데 있지 않다.
사건 발생 직후 무엇이 알려졌고, 정부는 어떤 내용을 발표했으며, 언론은 이를 어떻게 전달했는지를 비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신문은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매체지만, 특히 국가적 비상상황에서 작성된 초기 보도는 이후 확인된 사실과 함께 검토해야 한다.
■ 10·26 이후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했나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이어진 장기집권 체제는 막을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과 산업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평가받는 한편, 유신체제를 통한 장기집권과 정치적 자유 제한, 인권 탄압 등에 대한 역사적 비판도 받고 있다.
10·26 사건 이후 대한민국에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반란이 발생했고,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으로 민주화 과정은 다시 중대한 시련을 맞았다.
이후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전환점을 맞았다.
이처럼 10·26 사건은 한 대통령의 죽음이자 유신체제의 종말, 그리고 이후 민주화와 군사권력의 재편이 교차하는 출발점이었다.
■ 47년 전 호외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기록
1979년 10월 26일 밤 발생한 사건은 47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 호외에 실린 대형 제목과 빼곡한 기사들은 국가적 사건 앞에서 언론이 수행했던 긴급 보도의 역할을 보여준다.
또한 비상계엄과 통행금지, 대학 휴교 등 당시 국민이 겪었던 현실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역사자료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건을 실시간으로 접하지만, 당시에는 신문과 방송이 국가적 사건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통로였다.
한 장의 호외에는 사건 발생 당시의 긴박함과 정부의 대응, 국민에게 전달된 정보가 함께 남아 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다. 당시의 기록을 정확히 살펴보고, 그 사건이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47주기를 맞아 1979년 당시의 호외를 다시 펼쳐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