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항 성당 양정환 대건안드레아 신부의 강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신공항 성당 양정환 대건안드레아 신부의 강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김미혜 기자
  • 승인 2020.08.30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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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신공항 성당 양정환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신공항 성당 양정환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영종뉴스 김미혜 기자] 어제의 강론에 이어서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은 ‘착하게 사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인성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당연히 착한 모습까지 그려지지만, 그분들은 착하게 살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애쓰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 안에 스며든 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인성녀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거나 혹은 그분의 이름 때문에 죽은 분들이기 때문이지요. 성인들을 생각해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우선 ‘선택’이 필요하고, 다음 ‘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즉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선택은 이미 했습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길을 따라가겠노라고 길을 정한 사람들이지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는 선택을 한 우리는 이제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그 길을 안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분노가 올라오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할 때도, 눈 딱 감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거부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참아야 할 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의 위치와 명성에 흠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희생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 참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때에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님’께서 나를 위해 수없이 참으셨음을 알고 감사하기에, 그 마음 때문에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를 눈감아 준다거나, 비리를 모른 척 넘겨주면 생각지도 못한 이익이 생긴다고 하여도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라도 벌어서 헌금 많이 내면 되지 않는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스승님이 고통당하고 죽임당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마음 또 자신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드리겠다는 마음으로 드린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에도, 베드로를 사탄이라 일컬으시며 ‘걸림돌’이라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 중에도 청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의나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과 엮이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혹 들통나면 더 큰 곤혹을 치러야 함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이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음(요한 6,15)’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신은 ‘당신의 머리 둘 곳조차 없는(마태 8,20)’ 삶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비리를 저지른 자들은 ‘쓰러지고 넘어지리라(예레 8,12)’ 말씀하셨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이익이 생긴다고 하여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저의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 하나하나를 기억하시며 당신을 희생하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생각하며 무엇을 참아 보았습니까?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거부하고 무엇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잘못된 선택이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우리가 어찌하여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부터 찾고 기억해 내는 것, 이것이 늘 준비된 그리스도인의 삶이오, 깨어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주님의 나라에서 자신을 살리는 일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늘 준비되고 깨어 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2020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순교자들이 왜 순교했을까요?’하고 물으면 아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비슷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해 보니, 순교자들은 거의 다 ‘말 한마디’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말 한마디를 하거나’ 혹은 ‘말 한마디를 안 해서’ 죽임당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 한마디가 뭐 그리 중요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안 믿겠다”하고 나가서 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도구로 살면 더 좋고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기에 너무나 아깝다고 여겨지는’ 젊은 혹은 어린 순교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신앙인, 그리스도인이란 ‘믿음 때문에’ 사는 사람입니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을 버리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옳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신앙인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착하게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이 목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짖다가 죽임당한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선택한 것에 대하여 ‘틀렸다’고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순교자는 ‘믿지 말라’고 할 때 ‘그래도 믿겠다’ 하여 순교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강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한다 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에, 그것이 누구이든 잘못되었다고 가르쳐 옳은 길을 걷게 하는 것이 ‘믿는 이’의 임무라 여겼기에 헤로데에게조차 여러 차례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위대한 순교자라 말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저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이 탄압을 받을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당 안 나가도 착하게 살면 되지!’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하느님을 모른다면 착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잘 살다 죽으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임을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뜻이, 예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 기준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