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영종도 이야기 .... 아! 영종진 , 2부 영종진의 설치 배경과 이유
김영훈의 영종도 이야기 .... 아! 영종진 , 2부 영종진의 설치 배경과 이유
  • 우경원 기자
  • 승인 2020.01.19 0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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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전 중구 구의원현 안상수국회의원 비서관
김영훈전 중구 구의원현 안상수국회의원 비서관

영종진의 설치 배경과 이유

삼남지방(三南 ․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말함.)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싣고 오는 조운선(漕運船 ․ 세곡을 실어 나르던 배)들은 반드시 자연도 앞 바다를 통해 올라 왔는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삼남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통로 였으며, 조선중기 여러차례의 난을 격으며, 한강 일대의 수비를 보강 할 필요가 있고, 만약 겨울철에 변란등이 일어난다면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 가야 하는데 강화와 갑곶진(甲串津) 사이는 얼음장으로 뒤덥혀 뱃길이 통하지 않으므로 인천부(仁川府)에서 영종진을 건너가 강화로 가야 하는 등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에서 그같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자연도에 영종진을 설치했던 것이다.

영종진의 군사수는 6백 7십 4명이었다. 당시 영종진은 남양부(지금의 경기도 화성군)에 있던 부대였으므로 경기도와 충청도 양민의 장정들이 었으나, 모자라는 수는 자체적으로 해결토록 하였기에, 후에는 대부분의 군사들이 영종도에서 거주하던 양민의 장정들이 영종진의 군사를 이루게 되었다.

효종 4년(1653) 영종진은 종4품의 무관인 수군 만호(水軍萬戶)를 배치했고, 숙종7년(1681)에는 만호(萬戶)를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해안 방비를 강화 하였고, 숙종16년(1690)에는 국가 유사시 강화도로 급히 들어갈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해 영종진에 종2품 무관인 방어사(防禦使)로 진의 책임자를 승격 시켰다.

당시 강화의 각 진에는 최고의 책임자가 병마첨절제사 [兵馬僉節制使]로 종3품 무관직이었으나 영종진은 방어사(防禦使)로 종2품 무관인이 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으로만 보아도 영종진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가를 알수 있다.

운양호(운요호)사건 당시의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잠재되어 있다가 정한론(征韓論 ․ 일본 정부에서 일어났던 조선 정복에 대한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일본은 단계적 침략 전략을 가지고 조선에 접근하였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로,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하여 개항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 포함을 앞세운 무력시위로 상대국을 압박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하였다. 그 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양이정책(攘夷政策 오랑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한편,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운양호(운요호)사건이다.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부산에 침투시켰다. 이에 부산훈도 현석운(玄昔運)이 부산의 왜관(倭館 ․ 일본의 상관이 있고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은‘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현석운를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은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었다. 운양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하였다(1875. 9. 20).

운양호 사건

1875년 운양호(운요호)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사건(을해왜요라고 학계에선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운양호는 해양탐사라는 허울을 앞세워 인천의 앞바다에 침범하여 ,강화도와 영종도등 조선의 영내에서 고의적 분쟁을 일으키고 그를 빌미로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원래 사건의 발단이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식수를 찾는다는 핑계로 일본군 몇 명을 데리고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놀라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해 진과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노우에는 상륙을 기도했으나 수심이 앝아 접안이 어려운데다가 병력수도 적어 이를 포기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쌍방간에 전사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종도로 남하하여 영종진을 포격하였다. 맹포격에 영종진이 혼란에 빠지자 2척의 보트에 22명씩 육전대를 분승시켜 상륙하였다.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다. 그리고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영종진에서는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가 됐는데, 일본군은 단2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또한 영종진을 점령한 일본군은 운양호의 병사들을 상륙시켜 대포 38문을 비롯하여 총, 창검, 군복, 병서(兵書 ․ 국방과 직결되는 군사(軍事)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 기장(旗章 ․ 군대의 깃발), 악기 등 병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여 포로들에게 운반케 하였다. 그들은 퇴각에 앞서 성 안에 불을 질러 관아와 민가를 완전히 불태웠다.

운양호(운요호)사건의 결과

운양호 사건 이듬해인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강화도(江華島)는 한강 어귀에 위치하여 외세가 서울(한양)에 접근하는데 가장 가까워 서울 위협을 위해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례가 많았다.

운요호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포함외교의 한 형태이며, 이는 그들이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결과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공격도 보복당하여 그 책임을 조선에 묻고 강제로 수교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단초(端草)였으며 신호탄이었다.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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