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영종도 이야기 .... 아! 영종진 , 1부 영종도의 유래
김영훈의 영종도 이야기 .... 아! 영종진 , 1부 영종도의 유래
  • 우경원 기자
  • 승인 2020.01.14 0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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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전 중구 구의원현 안상수국회의원 비서관
김영훈(전 중구 구의원현 안상수국회의원 비서관)

지금은 국제공항이 개설되어 나라의 관문이 된 영종도는 예전에도 중요한 섬이었다. 비교적 일찍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이 섬에 인적이 시작된 것은 백제 때부터요 송악이 고려국의 서울이 되면서 지척의 영종도는 그만큼 요충이 되었다.

사실 영종도는 이미 고려 때부터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교역로로서, 8백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대송(對宋) 무역의 중간기착지였다는 사실은, HUB공항을 표방하는 입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종도가 본격적으로 우리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고려중기이다. 1211년 권신 최충헌(崔忠獻, 1149~1219년, 고려시대 무신이자 군인, 정치인)이 희종(熙宗 ․ 고려 제21대 왕)을 폐립(廢立 ․ 임금을 몰아내고 새로 다른 임금을 받들어 세움)하고 자연도로 내치면서 부터이다. 궁궐에서 최의 살해음모가 있었을때 왕에게 구명을 호소하자 희종은 외면했었다. 마침내 최는 구출되고 왕을 시역((弑逆 ․ 임금을 시해하는 행위)하자는 주장에도 그는 왕을 폐출(廢黜 ․ 어떤 사람을 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 그 벼슬이나 자리에서 쫓겨나다)하는 것으로 끝냈다.

영종도가 또다시 역사에 보이는 것은 몽고난중인 고종 때이다.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후 강화도마저 위태롭게 되자 다시금 남하하여 자연도로 옮길 궁리를 하게 된다. 그 후 조선조 말 외세가 밀려들자 영종진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게 된다. 두차례 양요를 치른 강화도가 바로 머리 위에 있고 영종도 앞바다는 강화도로 해서 한강에 이르는 길목이어서였다.

영종도(永宗島)는 그 옛날 자연도(紫燕島)라 불리던 섬이었다.

▲씨사이드파크 영종진
▲씨사이드파크 영종진

자연도가 영종도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중기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겪으면서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할 필요가 생기자 효종 4년(1653) 남양부(지금의 경기도 화성군)에 있던 영종진(永宗鎭)을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그 후 영종진이 있는 섬이라 하여 자연스레 영종도라 일컬은 것이다.

서해안의 영종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이 형성된 시기는 중생대 백악기 초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63년 6월 인천시립 박물관이 운남리(雲南理 ․ 지금의 운남동(영종동 주민자체센터 인근)) 석화산(石花山) 기슭에서 발굴한 고인돌과, 1990년 송산마을(松山 ․ 지금의 하늘도시 아파트 인근) 남쪽 해안에서 빗살무늬토기, 숫돌, 화살촉, 주먹도끼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 전한시대의 화폐인 오수전이 꾸러미로 나온 것이다. 이는 한반도 고고학 발굴 사상 첫 번째 사례로 영종도가 기원전부터 국제적 교역지 기능을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 쇠와 구리로 만든 화살촉(철경동촉)도 여러개 출토됐고 그동안 서해안 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았던 낙랑토기도 무더기로 나왔다.

삼국 시대의 영종도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발견된 것이 아직 없다. 다만 삼국이 한강 유역을 점령 했던 시점을 감안할 때 4세기까지는 백제, 5세기는 고구려, 6세기부터는 신라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 신라 시대에는 한산주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영종도 지역은 인주(仁州 ․ 지금의 인천)에 속했다. 이때부터 자연도(紫燕島)라 불렸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자연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2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주위가 55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자연도’라는 지명 유래는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종 1년(1123)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바를 글과 그림으로 적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에 전하는데, “객관(客館 ․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인 경원정(慶源亭)이 건립되어 있는 산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은 까닭에 ‘자연도(紫燕島 ․ 자주빛 제비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한 여지도서(與地圖書 ․ 1757(영조 33)~65년에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313개의 읍지(邑誌)·영지·진지를 모은 전국 읍지)에 영종의 주산인 백운산을 ‘자연고기(紫燕古基)’라 한 것으로 보아 이 곳에 제비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객관 ‘경원정’의 이름은 자연도가 인주에 속해 있었고, 인주의 옛 이름이 ‘경원’이었기에 그를 따서 붙인 것으로 그 규모는 10칸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경원정이 있던 자리는 사라지고 없으나 지금의 구읍 선착장 주변으로 자연도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고 한다. 고려와 송나라를 오가며 외교와 무역에 종사하던 사신과 상인들이 묵었던 자연도는 당시 대송(對宋) 해상 교류의 거점이었다.

조선왕조신록 세종조 지리지에는 자연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제물량 서쪽 수로(水路) 3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인데, 나라의 말 3백 58필을 놓아 먹이며,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가 있는데 모두 30여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자연도는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운영한 말 목장이 있던 곳으로 조정에서 중시 했음을 알 수 있다.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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