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뉴스, 유현종 영화감독을 만나다
영종뉴스, 유현종 영화감독을 만나다
  • 우경원 기자
  • 승인 2019.11.21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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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상 낙원, 팔라우의 전도사
유현종 감독과 기념사진
유현종 감독과 기념사진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유현종 감독을 영종도에 위치한 그림아일랜드에서 만났다. 

유현종 감독과 당 기자와는 만난지 15년이상 되었다.

이날 (21일) 만난 유현종 감독은 영종뉴스와 함께 영종도내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서 영화배우들의 흔적을 담고, 그날과 함께 영종도에 문화의 꽃을 피우자고 제안을 하였다,

"영종도을 아름답게 디자인 하자!"

"하늘을 날다, 영종을 날다, 영종을 디자인 하자 운동본부" 를 만들자고 제안도 함께 하였다.

그는 영화 잡지인 ‘비디오매거진’을 발행하여 한때 40만 부나 출간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93년에는 주윤발(周潤發·저우룬파)을 처음 데뷔시켰던 홍콩 영화사 해화성과 합작으로 영화 ‘龍虎天星’를 제작해서 아시아 16개국에 동시 개봉시켰다고 하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영화의 성공 여부를 물으니 국내에서 극장에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가 카드, 도박 등을 주제로 한 내용인데다 팔이 잘리는 등 잔인한 장면이 연출됐는데, 그 당시 막가파(派)가 사람을 잔인하게 살인하고 불에 태우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심의조차 못 받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게 된 것은 영화 실패 직후 우연찮게 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MBC TV)’을 시청하게 된 이후였다. 남태평양에 있는 팔라우에서 촬영한 방송에 해병대 전우가 출연한 것을 보고 자신도 직접 팔라우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해병대 전우 김정근(해병 257기)을 만났다.

유현종감독이 발행인으로 있었던 잡지사
유현종감독이 발행인으로 있었던 잡지
유현종감독이 발행인으로 있었던 잡지

 

김정근은 원양어선을 타고 그곳까지 갔다가 잠시 머물겠다고 주저앉은 것이 인연이 되어 현 주민과 결혼, 애들 둘을 낳고 셋째를 났으나 원주민의 아이가 태어나는 불상사가 나는 바람에 이혼을 한 비운의 방랑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상을 함부로 공개해도 되느냐고 질문하자 이미 인간극장(KBS 2TV)에 소개된 이야기라고 하며 그런 것이 다 인간사 아니겠느냐고 도인같이 대답했다.

자신은 처음 가 본 팔라우의 역사와 한국인의 애환이 어린 전쟁의 후유증을 보고, 늦었지만 역사의식을 찾는데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야겠다고 작정하여 그 후 7년간 미얀마, 대만, 팔라우 등지를 돌며 사비로 전사자 유골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찾은 유골을 묻어주는 일들을 했다고 한다. 왜 그런 일들을 했느냐는 질문에 껄껄 웃으며 “외국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반문하면서 팔라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팔라우는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미군과 붙은 최후의 격전지였다고 한다. 남태평양의 요새인 팔라우는 미국과 일본의 숨통을 조이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에 관동지역에서 온 일본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징용자들 상당수가 일본군에 배속되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군은 육군 7,212명 중 466명만 살아남았고 해군은 3,400명 중에 겨우 10명만이 생존하여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는데, 그 희생자들은 한국 징용자들과 위안부들이었다는 역사적 아픔을 말하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팔라우에는 ‘아이고 브리지(bridge)’라는 공식 관광 명소가 있는데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 노무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던 중 너무나 힘들어서 “아이고! 아이고!”하는 소리가 원주민들에게 들리게 되어 그 후 ‘아이고 다리’라고 불리게 됐다는 슬픈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곳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반문했다.


나의 사명은 팔라우에 ‘인성사관학교’ 세우는 것

한류 문화를 통해 대한민국 전파하고 파…

“앞으로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팔라우에 ‘인성사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미 개설 단계에 이르렀다고 했다. 미국과 일본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였던 곳이라 강인한 애국정신과 생존 법칙을 팔라우의 천혜적 자연환경에서 교육시킨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류 문화를 알리는 것으로, 자신이 무대 연습실을 차린 것도 전국에 무대를 만들어 한류 문화를 해외에 전수시키는 원천지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야심찬 이야기를 했다. 특히 한류 문화 전파의 구체적인 예(춤, 연극, 판소리, 창 등)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해 꽤 준비된 인상을 받았다. 또한 자신이 서울예대를 나왔기 때문에 현역들과 선배들의 자문과 협조를 많이 받고 있다며 은근히 자신의 자랑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끝으로 그의 해병대 생활을 질문했는데, 그는 이름도 없는 특수부대에 있다가 제대했다고 했다.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후 만들어진 해병대 특수부대는 저도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별장을 경비하는 등 국가 원수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공수훈련과 강한 영국 해병대식의 체제를 따른 것 같다고 했다.

이 점에 대해 필자가 계속 의아해 하자 당시 1개 비밀 소대가 편성됐는데 소대장이 중대장급인 한성걸 대위(해사 21기)였고, 34명의 사병 중 자신이 병장으로 제일 고참이었지만, 그때 힘든 교육 때문에 지금까지 해병대 정신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합 든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자신은 귀공자로 태어난 행운아(?)였으나 군대 가기 전 모터사이클 샤프트클럽 주 멤버로 철없이 방황했던 청년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의미 있는 미소가 엿보였다. 필자가 느껴지는 바가 있어 해병대 간 것이 혹시 도피성 입대였냐고 짐작하고 질문하자 친구들과 대마초를 하고 조직에서 놀기도 하다가 해병대로 도망쳐 해병 256기로 입대했노라고 실토했다.

해병대치고 과거 없는 사람이 있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통해 이제는 착해 보이기만 하는 얼굴로 노년의 문턱에서 얼쩡거리는 해병대 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인생 후반전에 많은 성공이 함께 하기를 빈다.

▲ 유현종은 누구?

● 서울예술대학, 뉴욕 영화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전공

● (사)예술나눔서울공작소 대표, 영화감독 (1992년 홍콩 해왕성영화사 데뷔), 시네마 서울 대표, 36홈쇼핑 대표(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장(1986년 발족), 비디오매거진 발행인, 송파해병전우회장(전), 1988년 한국 최초 요트 태평양 횡단(기획), 해병특수잠수전우회장(1990년 창단), 해병 축구단 단장 (2004년 창립), 국제 문화 예술교류단장 (2005년 창단), 한국 어린이 방송국 아카데미 원장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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