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국제도시, 우리동네 세무사 김선홍을 만나, 그의 6전7기 뚝심 이야기를 들어본다.
영종국제도시, 우리동네 세무사 김선홍을 만나, 그의 6전7기 뚝심 이야기를 들어본다.
  • 우경원 기자
  • 승인 2019.07.03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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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홍 세무사
▲김선홍 세무사

영종국제도시, 공항신도시에서 커피베네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동네 세무사로 영종국제도시 주민들 사이에 알려진 김선홍 세무사를 찾아, 그의 6전7기 세무사 이야기를 들었다.

7월3일 영종국제도시 공항신도시 카페베네 2층 사무실 (세무법인 솔)에서 김선홍 세무사(53세) 와 만났다. 씨름선수 같은 우람한 몸매와 순수함과 수줍음이 적당히 버무려진 얼굴. “이 양반 진국이구나” 그는 느낌이 자연스레 전해졌다.

만난 첫 말이 "저는 제가 머리가 제법 좋은 줄 알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꼴통' 이더라고요. 남들은 쉽게 붙곤 하는 세무사시험에 7수만에 붙었거든요. 모의고사 성적도 언제나 상위권이고 시험도 괜찮게 본 거 같은데 번번이 미역국을 먹는 제 자신이 제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어요. 정말 신이 얄궂게 내 인생을 담보로 장난을 치는 기분이었지요. 이젠 정말 포기해야 하나,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겨우 합격의 끈을 붙들 수 있었어요. 기쁨보다는 참담한 심정이었지요.”

“어렵게 시작한 만큼, 더 간절하게 세무사 일에 매달리게 되더라고요. 쉽게 합격 했다면 지금처럼 절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세상일은 언제나 양면성이 있나 봐요. 분명 좋다고 생각 했던 일이 나쁜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줄 알았던 일이 오히려 좋게 되기도 하는 건 순전히 그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고 전 믿어요.”

김선홍 세무사는 스스로 자칭 금수저 였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학과 출신으로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와 약국을 경영하던 약사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하게 태어난 그는 서울 개봉동 세곡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1등을 도맡아 하던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을 위해 약국도 접을 만큼 열성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강남 반포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강남 8학군이 된 거죠. 당장 2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더군요. 먼저 부잣집인 줄 알았던 우리집이 강남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수준의 불과 했다는 것. 또 제 성적이 대번에 반에서 평균 4-5등 쯤으로 내려갔다는 것이었죠. 어쨌든 그래도 어머니의 극성 덕분에 영동중, 휘문고를 나름대로 괜찮게 졸업할 수 있었어요.”

대학은 서강대 경영학과로 진학했단다. 한창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우울했다. 눈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를 괴롭혀오던 시력이 대학에 들어오면서 부쩍 더 나빠진 것이다. -20디옵터 이하까지 시력이 떨어져 책보기가 고역일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동기들은 모두 금용계 쪽으로 취업했지만, 전 취업대신 행정고시를 선택했어요. 눈 때문에 제2국민역으로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동기들보다 2-3년 더 여유가 있었거든요. 대전 이모 집에서 6개월쯤 공부하는데 눈이 점점 나빠져 너무 힘이 들었어요. 고시를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취직을 했죠. 한주통상 국내영업 파트인 '엘레쎄 브랜드' 에서 의류 MD로 일했어요. 그러다 1991년 여름. 다시 금성사 (지금의 LG 전자)기획실에 입사했죠.”

회사의 비전과 중장기잔략 경영실적 평과와 원가관리 회계 등을 주로 맡았단다. 타점 받고 대리에서 과장까지 2년 만에 승진도 하고. 임원들에게 인정도 받으며 나름대로 잘 나갔다. 1995년 3월 참한 아가씨 와 연애도하고 결혼도 했다. 숙명여고를 나와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역시나 호사다마인가보다. 34살이 되던 해,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만 것 이다. “기획실 경영전략 회의를 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뫼비스의 띠처럼 꼬여 보이더니 이내 커다랗고 시커먼 파리가 눈앞을 가로막아 버리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그길로 병원엘 갔더니 망막에 구멍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소위 '열공성 망막박리'라는 질환이었죠. 인생이 끝장난 기분이었어요.”

건양대병원에서 1차 수술로 '공막돌륭술'을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안구 중앙 부위에 가스방울을 주입히는 '기체망막유착술'도 실패로 돌아갔다. 고도난시와 심각한 근시 때문이었다. 3차 수술은 아산병원 윤영희 박사가 집도했다. 실리콘 오일로 망막에 생긴 구멍을 막는 수술이었다. 사실상 최후의 수단이었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 한다 해도 반드시 시력이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 김선홍 세무사
▲ 김선홍 세무사

천운이었어요 수술은 성공했고, 생활이 좀 불편할 정도이긴 하지만 시력도 웬만큼 건질 수 있었지요. 덕분에 잘 나가던 회사에는 사표를 내야했어요. 이 실낱 같은 시력으로 대기업의 살인업무를 감당하기엔 무리였거든요. 당장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어요. 공인중개사학원에 등록했죠. 6개월쯤 공부해 합격하고, 1999년 6월 공인중개사자격증을 땄어요. 부동산사무소를 낼 요량 이었지요.

한창 부동산사무소를 알아보고 다니는데, 장인어른께서 '세무사 시험 을 쳐보라고 권하시는 거예요.”

2000년 4월 처음 세무사 자격시험에 응시해봤지만 1차에서 떨어졌다. 다음에 1차에는 합격했지만 2차에서 고배를 마셨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인의 권유로 마지못해 세무사 시험공부에 임하긴 했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부동산 쪽에 쏠려있었다. 당시는 부동산 시장의 최고 활황이던 시절이어서, 여기 저기 돈들이 눈에 보여 마음잡기가 힘들었단다.

'마침 아내도 박사과정을 공부를 위해 학교를 다시 나가게 되면서, 제가 돈을 벌어야 했기에 2002년 8월 고양시 덕양구에 부동산 사무실을 오픈 했지요. 2003년엔 마포 신공덕동 재개발단지에 부동산 사무실을 하나 더 냈어요. 제법 돈도 벌었지요 물론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는 중간 중간 세무사 시험때가 되면 벼락치기 공부를 해서 응시하긴 했어요.

2004년에 접어들자 정부의 부동산규제정책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계약률은 곤두박질치고 인건비며 사무실 운영비는 배로 치솟았다. 자격증이 있는 지인에게 중개사무실을 맡기고 다시 세무사시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2005년엔 딱 1 문제 차이로 아쉽게 떨어졌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아예 짐을 싸들고 고시원에 틀어박혔죠. 2006년 1차 합격 후에는 학원 모의고시반에 등록했어요. 바보 빼놓고는 모두 붙는다는 유명한 고시학원이었는데, 학원에서 모의고사 볼때마다 항상 전체 10등 안에 들었기 때문에 강사들도 동료 수강생들도 모두 저의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또 다시 떨어지고 말았지요. 제가 맨날 가르쳐주던 수강생들 조차도 합격하는 판에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2007년엔 가장 자신있어하던 회계학 과목에서 39 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점수를 받았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시력 때문에 문제를 재빨리 읽어나가는 데 지장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이건 도무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안았다.

그때 제 나이가 어느덧 43살이였어요. 세무사 시험이라는게 나 와는 도저히 안 맞는 건가? 이쯤에서 그만 포기를 해야 하는 걸까?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해서 견딜 수 가 없었어요. 아내와 딸 아이 보기도 부끄러워. 아무도 몰래 바다로 뛰어들어버릴까 생각도 했어요. 시험이란 놈이 무섭고 끔직한 괴물 같았지요. 그러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해보자 마음을 다졌다. 이 악물고 흐릿한 시력을 집중해 두문불출 공부에만 매달렸다. 이번에도 안되면 깨끗이 접고 평생 부동산중개사로만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08년 마침내 1, 2 차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사실 마지막 시험에서도 세무회계문제를 너무 많이 놓쳤어요. 역시 안 되는 건가? 실망감이 지나쳐서 오후 시험을 포기 할까 망설이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울먹임에 도저히 포기한다는 말을 할 수 가 없었어요. 그래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 그것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에게 그래도 덜 미안한 행동 일거라 생각 했지요. 그런데 정말 시험이라는 놈은 끝까지 짓궂더라고요 떨어졌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속으로 수없어 제 자신을 난도질한 뒤였는데 뜻밖에 합격이였어요. 와르르 가슴이 무너져 내려 한동안 아무 말도 할수 없었어요. 세상에 나만큼 세무사 시험을 힘들게 통과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어요.

김선홍 세무사는2002년 부동산사무실을 시작하면서, 인천 영종도에 아파트 2채를 사두었는데, 그게 인천사람이 되는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그 자신도 미처 몰랐다고한다. 인천 앞바다와 예쁜 섬들 신선한 공기에 반해버린 그의 어머니가 먼저 2004년 이사를 들어와 약국을 차리셨고, 이어서 그도 가족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따라와 인천 영종도 사람이 된지가 벌서 15년째였다. 망막박리로 삶이 급해진 아들을 위해 나이 60에 다시 약국을 연 그의 어머니는 80살에 영종도 공항신도시 메디칼약국 관리약사로 은퇴할 때까지 20년을 더 일하셨다. 2009년 인천세무서 연수를 1등으로 마친 그는 같은 해 7월 영종도 공항신도시 운서동에 김선홍 세무사 사무소(개인)를 차리고, 인천세무서 국세심사의원 인천 중구청 결산검사심사위원 ,인천지역 세무사회 감사, 인천경실련 감사, 운서동주민자치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김선홍 세무사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고시는 최소 10,000시간 이상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어요. 아무리 머리가 나쁘다쳐도 20,000시간을 투자하면 무조건 합격하는 거라고들 말해요.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애기죠. 하지만 세상 일에는 뭐가 더 유익한 건지 당장 알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늦은 만큼 더 절실하고 소중하게 제 일을 사랑해나갈 겁니다.

김선홍 세무사는 언제부터인가 영종도가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큰딸은 인천 하늘고 수석입학, 수석졸업하여 연세대에 들어가 5학기 연속 장학금을 받고 있는 김선홍 세무사의 자랑 멘트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김선홍 세무사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전화기 (032.747.0354) 벨소리가 계속울린다.

오늘도 김선홍 세무사는 고객을 만나기 위해 뛰어 가는 , 뒤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영종뉴스 우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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